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회선 교환과 패킷 교환

길을 공유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. 하나는 통화하는 동안 길 하나를 통째로 빌리는 방식이고, 다른 하나는 데이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때그때 빈 길로 보내는 방식입니다. 앞의 것을 회선 교환, 뒤의 것을 패킷 교환이라고 부릅니다.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면 인터넷이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가 보입니다.

회선 교환 — 길을 통째로 빌린다

옛날 전화를 떠올려 봅시다.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면, 통화가 연결되는 순간 나와 상대 사이에 전용 길이 하나 만들어집니다. 통화하는 내내 그 길은 오직 우리 둘만 씁니다. 말을 하든 안 하든, 침묵하는 동안에도 그 길은 우리 차지입니다. 통화를 끊어야 비로소 길이 풀려 다른 사람이 쓸 수 있습니다.

이것이 회선 교환입니다. 장점은 분명합니다. 일단 길이 만들어지면 데이터가 일정한 속도로 끊김 없이 흐릅니다. 단점도 분명합니다. 침묵하는 동안에도 길을 점유하므로 낭비가 큽니다. 통화 중 30초를 가만히 있어도 그 길은 남에게 양보되지 않습니다.

패킷 교환 — 조각으로 잘라 빈 길로 보낸다

인터넷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. 데이터를 통째로 보내는 대신 패킷이라는 작은 조각으로 자릅니다. 각 패킷에는 '어디로 가야 하는지' 주소가 적힌 꼬리표가 붙습니다. 그리고 이 패킷들은 그때그때 비어 있는 길을 따라 제각기 목적지로 향합니다.

택배를 떠올리면 쉽습니다. 큰 짐을 여러 상자에 나눠 담고, 각 상자에 받는 사람 주소를 붙여 보냅니다. 상자들은 서로 다른 트럭에 실려 다른 경로로 갈 수도 있지만, 결국 같은 집에 모입니다. 받는 쪽은 상자를 순서대로 다시 모아 원래 짐을 복원합니다.

패킷 교환의 장점은 길을 잘게 나누어 쓰므로 낭비가 적다는 것입니다. 한 사람이 침묵하는 사이 그 길로 다른 사람의 패킷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. 단점은 길이 그때그때 다르다 보니 패킷이 도착하는 시간이 들쑥날쑥하고, 길이 막히면 일부 패킷이 늦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.

인터넷이 패킷 교환을 택한 이유

이 들쑥날쑥함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이 패킷 교환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. 바로 효율과 견고함 때문입니다. 길을 잘게 나눠 쓰니 같은 회선으로 훨씬 많은 통신을 감당할 수 있고, 특정 경로가 끊겨도 패킷이 다른 길로 우회할 수 있습니다. 패킷 교환은 본래 일부 노드가 끊겨도 우회해 통신을 잇는 견고한 방식을 구상하면서 제안된 개념이고, 이후 ARPANET을 거쳐 인터넷의 바탕이 되었습니다. 이 점을 떠올리면 패킷 교환의 선택은 자연스러운 결론이었습니다.

다만 이 선택은 숙제를 남깁니다. 패킷이 사라지면 어떻게 알아채고 다시 보낼지, 순서가 뒤바뀌면 어떻게 제자리에 놓을지, 길이 막히면 어떻게 양보할지 같은 문제들입니다. 놀랍게도 이 숙제들은 서로 다른 계층이 나누어 맡습니다. 다음 장에서 바로 그 '계층'이라는 아이디어를 만나 보겠습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