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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터넷의 모습

패킷이 여행한다고 했는데, 도대체 어디를 거쳐 여행하는 걸까요. 인터넷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몇 가지 역할이 보입니다. 데이터를 만들어 내고 소비하는 끝단의 기기들, 그 사이에서 패킷의 길을 잡아 주는 중계 장비들, 그리고 이들을 묶어 서비스하는 사업자들입니다.

호스트 — 인터넷의 끝단

여러분의 노트북, 스마트폰, 그리고 저편의 웹 서버처럼 데이터를 직접 만들고 받는 기기를 호스트 또는 종단 시스템이라고 부릅니다. 인터넷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뜻에서 끝단이라고도 합니다. 우리가 쓰는 모든 앱과 웹사이트는 결국 한 호스트에서 다른 호스트로 데이터를 보내는 일입니다.

호스트는 흔히 두 가지 역할로 나뉩니다. 서비스를 요청하는 쪽을 클라이언트, 그 요청에 응답하는 쪽을 서버라고 합니다. 브라우저로 웹사이트를 열면 브라우저가 클라이언트, 웹사이트를 담은 컴퓨터가 서버입니다. 다만 이 구분은 역할일 뿐이어서, 한 컴퓨터가 어떤 통신에서는 클라이언트, 다른 통신에서는 서버가 되기도 합니다.

라우터 — 갈림길의 안내자

호스트와 호스트 사이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습니다. 이 갈림길마다 서서 패킷의 꼬리표(목적지 주소)를 보고 '이 패킷은 저쪽 길로 가야 한다'라고 다음 길을 정해 주는 장비가 라우터입니다. 패킷 하나가 목적지에 닿기까지 보통 수십 개의 라우터를 거칩니다. 뒤에서 traceroute라는 명령으로 이 길을 직접 추적해 볼 텐데, 여러분의 패킷이 생각보다 먼 길을 돌아간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릅니다.

라우터가 하는 길찾기를 라우팅이라고 합니다. 라우팅은 이 책 PART 04의 핵심 주제입니다. 지금은 '갈림길마다 다음 길을 안내하는 장비가 있다' 정도로만 기억해 두면 충분합니다.

ISP — 인터넷을 잇는 사업자

여러분의 집이 인터넷에 연결되는 것은 통신사, 곧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(ISP) 덕분입니다. ISP는 동네의 가입자들을 모아 더 큰 네트워크로 연결하고, 그 큰 네트워크들은 다시 더 큰 네트워크로 이어집니다. 이렇게 작은 네트워크가 큰 네트워크에, 큰 네트워크가 더 큰 네트워크에 계층적으로 묶이면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됩니다.

그래서 인터넷은 누가 통째로 소유한 단일 기계가 아니라, 수많은 독립된 네트워크들이 약속(프로토콜)을 공유하며 서로를 잇기로 합의한 느슨한 연합에 가깝습니다. 인터넷(Internet)이라는 이름 자체가 '네트워크들 사이(inter-network)'를 뜻한다는 점이 이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.

한 장의 그림으로

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묶으면 이렇습니다. 호스트가 만든 데이터는 패킷으로 잘려, ISP들이 깔아 둔 길을 따라, 라우터들의 안내를 받으며, 목적지 호스트까지 여행합니다. 이 여행의 각 단계를 누가 책임지는지를 깔끔하게 나눈 것이 바로 다음 장에서 만날 계층 모델입니다.